신세기 에반게리온 해석(tva판), 주인공 신지의 ‘일본의 굴레’

신세기 에반게리온 티비판은 1995년에 나왔다.  마지막 25화와 26회가 주인공 신지의 독백 만으로 이뤄져 있기에 신세기 에반게리온 해석을 하려면 1997년에 나온 극장판인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봐야 가능하다. 이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25화 26화를 다시 제3자의 시점으로 제대로 마무리한 작품이다. 최근에 이 시리즈를 다시 보면서 과거에 느낀 감탄보다는 일본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더 많이 들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해석 신지 일본인 불쌍 굴레

90년대 일본 애니의 심오함

90년대 한창 유행할 때 일본의 애니가 다루는 주제들을 보면서 심오함을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전쟁과 같은 대결 상황에서 각 주인공이 겪는 갈등과 고민은 그 당시에 소화하기 힘들었다. 감당하기 힘는 내용과 주제이기에 마냥 놀라워 할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책이나 유튜브 등 여러 매체를 통해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알아가면서 그 심오한(?) 얘기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생각의 변화는 우리나라의 서브컬쳐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일본 서브컬처의 몰락과 ‘일본의 굴레’

90년대 후반의 최대 히트작인 에반게리온도 이런 나의 인식의 변화를 겪게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나올 당시에는 무언지 모를 이 작품의 주는 중2병의 기운과 주인공을 따라 나는 누군가에 대한 고민을 했을 듯싶다. 하지만 지금 이 작품을 보고 나서 어떤 외국인 기자가 쓴 ‘일본의 굴레’라는 책이 떠오른다.

이 ‘일본의 굴레’라는 책에서는 지금 현재의 일본의 사회의 자민당이 계속해서 집권하는 분위기 이유와 70 80년대 화려한 경제 성장과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여전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외국인의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최근 오징어게임이나 기생충이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는 것은 물론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한 개인과 그가 속한 사회에 대한 어떤 메시지가 공감이 바탕에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 흥미로운 스토리와 연출로 표현하여 재미와 의미를 함께 전달하고 있기에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것으로 평가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해석 신지에서 발견되는 일본인의 집단 정서

일본에선 그런 작품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일본의 애니가 서브 걸쳐도 세계를 거의 지배했던 90년대 대표작인 에반게리온에서도 그런 대비를 보여준다. 주인공인 신지는 사도와 에반게리온이 치열하게 싸우는 상황을 상당 부분 내면의 갈등으로 소화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결핍이 있는 신지는 아버지의 무언의 강요를 통해 에반게리온의 파일럿이 된다. 치열한 전투 상황에서 자신의 처한 환경과 그 전투가 나와 주변 상황에 미치는 영향 등은 고민의 1순위가 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결핍과 자신의 파일럿으로 싸우는 이유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사랑받고 싶어 하는 양가감정이 뒤섞여서 부정적인 감정이 클 때는 에반게리온 탑승을 거부하기를 반복한다.

물론 작품 전체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결핍과 외로움 그리고 관계의 의미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사도와 에반게리온의 대결과 점점 밝혀지는 그들이 대결 이유는 신지의 갈등의 배경을 이루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몇 해 전 일본의 한 고속도로가 갑작스러운 폭설로 몇 시간 동안 마비된 일이 있었다. 이때 모 회사의 과자를 싣고 가는 차도 같이 갇혔는데 도로에 갇혀 배고픈 사람들에게 이 과자를 나눠져서 화제가 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한국이었다면 그런 사건이 터지면 기상청은 뭐 했느냐 도로공사는 뭐 했느냐 해당 지역의 지자체는 뭐 했느냐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그런 사건이 나면 하필 내가 거기서 있어서 그랬다고 넘어가는 것이 대다수의 심리라는 것이다.

일본인의 집단 정서와 2차 세계대전

그 심리를 가진 이유는 결국 역사적으로 긴 시간에 흘려서 구축되었을 것이다. ‘일본의 굴레’라는 책에서도 등장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다이묘를 중심으로 철저히 지역별로 계급 사회에서 성장했다.

우리나라처럼 전국적인 민란이나 민중 봉기가 일어날 수 없는 사회 구조에서 철저하게 집안 대대로 어떤 직업이든 대를 이어서 대물림하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기에 지금도 정치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는 결국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수많은 인접 국가에 피해를 줬으면서도 국민 전체는 제대로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 했다. 거기에는 미국이 광복 이후 들어와서 친일파를 그대로 기용한 것과 같이 기존의 사회 질서와 관리자들을 계승하는 정책이 한몫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 국민이 대대로 이어온 신분 질서에 길들어진 정서와 결정적으로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면서 이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경제성장을 하게 된 것이 사회보다는 내면에 침착하게 되는 집단 정서가 굳어지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각 개인이 대중으로 주변 사람들과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어떻게 연대하며 싸워나가야 할지에 대한 인식은 경험하지 못했고 성장하지 못했다. 섬세함을 가진 민족이기에 그런 부조리하게 형성된 집단 정서 속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와 연결되지 보다는 따로 노는 것으로 보인다.

그 질문은 세상이 아닌 내 속으로 침착 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정서에 흐름은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내용의 감탄보다는 왠지 모를 일본인에 대한 측은함이 더 느껴졌다.

물론 작품에 말하는 주제 자체는 한 인간으로서 충분한 울림이 있었다. 나의 결핍과 관계 형성에서 나는 얼마만큼 인간으로서 성장해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런 그 상황에 놓인 주인공들의 모습은 여전히 굴레에 있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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