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황소서는 신라 헌강왕 때의 문신이자 문인인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서 활동할 때 지은 격서(檄書)입니다. 격서란 적에게 보내는 공식적인 문서로, 항복을 권유하거나 죄상을 규탄하는 내용을 담고
창작 배경과 내용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일하면서 이 작품을 썼습니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황소(黃巢)의 난이라는 큰 민란이 일어났는데, 황소는 반란군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최치원은 황소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격문을 대신 써주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격황소서입니다.
작품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도(道)와 권(權)이라는 유교적 개념을 내세워 천하의 이치를 설명하고, 당나라 조정은 정당하고 강하며 황소 무리는 잘못되고 무모하다는 점을 대비시켜 보여줍니다. 그리고 황소가 현실을 올바르게 파악하여 항복하도록 설득합니다.
작가 소개 – 최치원(崔致遠, 857~?)
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문학가입니다. 857년(헌안왕 1)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당나라 유학과 활동: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에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이후 당나라에서 약 16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뛰어난 문장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특히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일하며 각종 공문서를 작성했는데, 이때 격황소서를 썼습니다.
귀국 후 활동: 885년(헌강왕 11) 고국으로 돌아온 후 아찬의 벼슬을 받았지만, 신라 사회의 문란함과 골품제의 한계 때문에 뜻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관직을 사퇴하고 가야산 해인사 등에서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문학적 업적: 한문학의 대가로 『계원필경집』 20권을 편찬했으며, 이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문집입니다. 시, 부, 기행문, 전기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고, 특히 변려문에 뛰어났습니다.
문학적 특징
격황소서는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라는 문체로 쓰여졌습니다. 이는 네 글자와 여섯 글자를 기본으로 하여 문장을 대칭적으로 배열하는 화려한 문체입니다. 최치원은 이 문체를 매우 능숙하게 구사하여 대장법(對仗法)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습니다.
특히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죽이기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도 벌써 죽이기를 의논했다”라는 구절은 매우 유명합니다. 이 구절을 읽은 황소가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문장의 힘이 강했습니다.
문학사적 의의
첫째, 중국 문학과 한국 문학의 교섭 관계를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한국인 작가가 중국에서 중국어로 쓴 작품이지만, 최치원이라는 한국인의 경험과 사상, 문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창작되었기 때문에 한국 문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문학의 실용적 힘을 잘 보여줍니다.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니라 실제 정치적 상황에서 상대방을 설득하는 강력한 도구 역할을 했습니다.
셋째, 위협과 회유를 조화시켜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무력으로 위협하면서도 동시에 합리적 설득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습니다.
한계와 평가
격황소서는 형식적 아름다움에 치중한 나머지 작가 개인의 독특한 사상이나 정서가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라 전 기간을 통해 가장 뛰어난 문장으로 평가받으며, 후세 문장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개요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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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정보
갈래: 격서, 설득문, 사륙변려문
성격: 실용문학, 교훈적
작가: 최치원 (신라 헌강왕 때)
배경: 당나라 황소의 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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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내용
황소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격문
당나라의 정당성과 황소 무리의 무모함 대비
도(道)와 권(權)을 통한 천하 이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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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특징
문체: 사륙변려문 (四六騈儷文)
수사법: 대장법(對仗法) 활용
어조: 위협과 회유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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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적 의의
중국-한국 문학 교섭사의 중요 자료
문학의 실용적 힘 증명
신라 최고의 문장으로 평가
후세 문장가들에게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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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형식미 치중으로 개성적 사상 부족
작가 개인의 정서 표현 미흡